A씨는 조금 일찍 법정 2XX호실에 도착했다. 점심시간 이후라서 그런지 전자게시판은 아직 켜져 있지 않았다. 게시판 아래 ‘진행 중과 준비 중’이라는 글자가 뜨면 법정 안으로 입장하라는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다.
드디어 닫혀 있던 법정 문이 열리면서 안내인이 소송 판결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만 모두 들어오라고 하였다. 지난번에는 문을 열어 놓고 진행하더니 이번에는 문을 아예 닫아 버렸다.
복도의 벤치에서 조금 기다리니 사건번호 앞에 ‘진행 중’이라는 글자가 떴다. 법정 뒤쪽 책상에 앉아 있는 안내인에게 다가가 변론기일통지서를 보여주니, 중간쯤을 가리키며 기다리라고 손짓을 한다. 이 사건의 피고는 모두 15명이다. A씨는 그중의 한 명이지만,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하여 앞쪽 두 번째 줄에 가서 앉았다. A씨도 한말씀하려는 생각이었다.
단상 정면에는 나이 지긋한 판사가 앉아 있고, 단상 바로 아래 좌우측에는 컴퓨터를 켜 놓고 작업을 하는 남녀 직원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좌측 벽에는 사진을 띄운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었다. 우측에는 증인석이 있었다.
원고와 피고의 자리는, 방청객 바로 앞이었다. 판사를 바라보는 위치에 좌측은 원고, 우측은 피고의 자리로 표시된 책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방청객의 자리는 정면을 향해 좌우측으로 나뉘어져 족히 10줄 정도는 돼 보였다.
A씨는 자신의 사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우연히 바로 앞 사건을 방청하게 되었다. 원고와 피고는 납품자와 오더 사이인 것 같았다. 판사는 돈이 오갔지만 그 돈이 어떤 명목인지 명시가 되어 있지 않아, 서로의 주장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인지시켰다. 그랬더니 둘 다 그것을 인정한다고 했다. 판사는 둘이 합의를 하라고 하며, 합의실로 갈 것을 명령했다. 합의실 위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재판 과정을 보면서 서류상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A씨의 사건은 15명이 피고라 누가 대표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뒤에 앉아 있는 안내자에게 물어보았더니, 사건번호를 부르면 피고석에 가 앉으라고 했다. 피고석은 두 개였다. A씨는 판사가 사건번호를 부르자마자 얼른 튀어 나가 앉았다.
판사는 사건번호와 원고, 피고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출석을 확인했다. 원고는 변호사인 것 같았다. 피고석에 앉은 A씨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판사가 앞에 있는 사람한테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라고 했다. A씨는 뒤에 있는 방청석으로 가서, 가방 안에서 주민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런데 A씨 옆자리에는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15명 중에 피고는 A씨 한 사람만이 출석했다는 것이다. 좀 놀랐고 의아했다. 이렇게 관심이 없나 싶었다. A씨 혼자 변호사와 법정 싸움을 하는 건가? 아, 이건 좀 아닌데... 어떻게 하지? ... 아이 모르겠다... 여기까지 온 이상 A씨는 하고 싶은 말, 준비한 말이나 여한 없이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피고가 변론기일에 출석하지 않으면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닌가? 피고가 15명이나 되니 누군가 A씨보다 절박하고 똑똑한 사람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런... A씨는 자기 혼자라도 왔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판사는 이 사건이 관리비의 미납과 관리비의 적정성 여부가 함께 걸려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 다양한 분양 면적, 영업 여부 등을 따져서 관리비를 적절하게 책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판사는 그래서 집중심리 부서로 넘긴다고 한다. 헉? 이거 무슨 얘기지? 판사는 알겠냐고 두 사람에게 동의를 구했다. 여기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건으로 바뀌었다는데... ‘네’라고 떨떠름하게 대답했지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A씨는 무엇보다도 사건이 또 딜레이된다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정말 소송이란 길고 긴 싸움이라고 하던데 당해 보니 정말 그랬다. 소장 받고, 답변서 쓰고, 1년여 만에 변론기일통지서를 받고, 다시 속행하는데 두 달, 다시 집중심리 사건으로 넘어가면, 다시 새로운 소장이 날아 올 것이고... 또 변론기일통지서... 무한반복이다. 사건이 종결되자면 최소한 2~3년이 걸릴 것 같다. 그 와중에 또 얼마나 속을 끓일 것인가. 정말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이렇게 마냥 질질 끌려다닐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적이지만 변호사를 만나 가장 신속하게 소송이 끝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겠다.
A씨는 옆에 앉아 있던 변호사에게 다가갔다. ‘원고측 변호사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한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는 다른 재판에 가봐야 해서 바쁘다며, 뒤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과 얘기를 하세요’하며 급히 자리를 떴다.
A씨는 그 사람한테 ‘어떻게 되시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이 사건의 법무대리인이라고 한다. A씨는 가지고 온 자료를 꺼내 관리비의 오류를 지적했다. 어차피 돈이 걸린 문제이니 일단 오류부터 잡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그런데 대리인은 관리비 책정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려서 하는 것이라 자신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A씨가 법무대리인이 모르면 ‘컴퓨터 프로그램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냐’고 했다. 그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처지라고 하며, 관리소장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인사도 없이 그냥 황망하게 가버렸다. 이것이 A씨가 제 2차 변론기일에 출석한 허망한 에피소드의 전말이다.
'살다보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원으로부터 소송 취하서를 받다 (0) | 2022.02.24 |
---|---|
등기로 받은 변론기일통지서 (0) | 2022.02.22 |
변론기일 혼자 써보는 추가 제출서면 (0) | 2022.02.19 |
서울남부지방법원 변론기일에 출석하다 (0) | 2022.02.18 |
혼자 써보는 법원 소장에 대한 답변서 (0) | 2022.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