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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와의 전쟁

치매, 알츠하이머, 인격은 변하지 않는가

by 평정러 2022.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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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모친과 은행에 공과금을 내러 갔다. 평소에 인터넷 뱅킹을 이용한 터라, 지로용지로 납부한 것은 상당히 오랫만이다. 은행원은 통장과 지로 용지를 가지고 공과금 납부 기기에 가서 직접 수납하라고 했다. 은행원이 돈을 받고 지로 용지에 수납 확인 도장을 쾅쾅 찍어 주던 예전의 풍경과 사뭇 다르다.

 

공과금 수납 기기에 가서 통장을 넣고, 지로 용지를넣었다. 비밀 번호를 모친이 잊어 먹어서 3회 오류가 났다. 창구에 다시 가서 비밀 번호를 재 설정했다. 모친은 자신의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지 번호표 뒷면에 번호를 적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확인하자고 하더니, 그 사이 또 재설정한 비번을 잊어 버려 오류가 났다. 비밀 번호를 0.5초 사이에 잘못 적어 둔 것이다. 여러 번 창구 직원과 확인한 끝에 결국 비번을 제대로 설정하고, 메모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도 대단한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화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기다려주고 또 기다려 줄 일이다. 모친은 은행을 나오면서 비밀 번호를 적은 번호표 메모지를 어디에 둔 줄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지갑 사이에 넣어 둔 것을 찾아서 잘 보이도록 다시 꽂아 드렸다.

 

식당에서 주문을 해 놓고 막간을 이용해서 공과금 자동 이체를 시도했다. 본인도 있고, 통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수도요금과 도시가스요금은 어떻게 했는지 잊어버렸는데, 이미 자동 이체가 되어 있었다. 전기요금은 한전에 직접 연락을 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내가 전화를 걸었지만, 모친과 직접 통화를 해서 여러가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통장 번호를 알려 주고 다음 달부터 자동이체가 가능하다고 한다. 핸드폰도 매장에 직접 가서 직접 자동이체 신청을 해야 했다. 역시 통장이 있어야 했다. 주소 변경도 마쳤다.

 

내가 자동 이체에 신경을 쓴 이유는 연체 가능성도 있고, 지로 용지를 들고 은행에 가서 해결하기도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지로 용지를 보면 자꾸 돈 계산을 할 것이며, 이는 생활비 걱정으로 연결되며, 생활비걱정은 누가 돈을 훔쳐갔다는 망상으로 이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큰동생댁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누가 15만원을 훔쳐갔다고, 장손을 닥달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15만원을 훔쳐가는 것을 봤다며, 누군지 대라고 난리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아까 분명히 모친을 집 앞에 데려다 주면서, 돈 없어졌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아주 멀쩡하게 '돈을 누가 가져간다고 그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은 안 하지. 또 가족이 가져 가면 좀 어때, 일부러라도 줄텐데...' 이렇게 말했었다.

 

이중 인격을 쓰는게 너무 싫었다. 알츠하이머가 뇌의 노화이고, 치매의 전 단계이고, 건망증이 심한 정도로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중 인격을 쓰는 것은, 단순한 건망증의 차원이 아니라, 인격의 차원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은 건망증의 문제이지, 기본 인격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며칠 전 모친은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어 '본인을 옥탑방에 가두어 놓았다'라고 하면서, 'X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악담까지 했다고 한다. 누구에게는 모친이 20회도 넘게 전화를 했다며 캡쳐한 것이 단톡에 올라 왔다. 다른 이는 온 식구들 욕을 돌아가면서 다 했다고 하고, 누구는 평생 들을 욕을 다 들었다고 학을 떼었다. 

 

다들 그렇게 적게는 수회 많게는 수십회가 넘는 전화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달림을 받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놀랍게도 모친은 내게 전화를 한 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더 경악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강한 평소의 인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정말 치매라면 내가 강자인지 약자인지 모를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게도 공평하게 무차별적인 전화를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모친은 사악한 전략을 짜는 것이다. 먹힐 사람에게만 자신의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분면 내게도 사악함이 있다. 그러나 건강하게 사는 것을 택하면서 사악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내 것이 투사된 것일까, 모친에게서 치매에 걸려도 해결되지 않는 나 자신의 사악함을 보는 것 같아 심한 역겨움을 느낀다. 

 

결국 모친의 사악하다 못해 악독한 전략은 가족의 냉대로 이어졌다. 모친을 케어하기로 한 식구 한 명이, 평생 욕을 다 먹고 나니 부딪힐 것 같다며 안 가기로 했다고 한다. 내가 모친을 케어하고 단톡에 사진이나 일과를 올리면, 보통은 답문이 있는데 아무도 올리지 않았다. 얼마나 난리를 쳤으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정말 모친에게 다들 만정이 똑 떨어진 듯한 분위기이다. 

 

나는 '전화로 많이 만났으니 그걸로도 충분해. 마음 고생 많았네.'라고 단톡에 올렸다. 또 한 식구가 내게 전화를 했다. 자기 아들에게까지 하지도 않은 전화를 왜 안받느냐는 등 이지메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면서 속상하다며 내내 울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모친의 간병에 모친이 이렇게 큰 변수가 될 줄은 몰랐다.

 

"일단 전화를 받지 마. 받아 봤자 이상한 얘기만 하고, 좋은 얘기도 아니고 사람 우울하게 만들잖아. 또 전화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거야."

"혹시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봐, 어디 길이라도 잃을까봐 걱정이 돼서 전화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하이고 그 양반 피지컬 엄청 좋아. 나보다 힘도 세서 내 쌍화차 병 뚜껑 열어줬잖아. 그리고 겁도 많아서 막 돌아다니지도 않아. 조심성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덧붙였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장기전이야. 벌써부터 지치면 안돼. 우선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무시할 건 무시하고, 울지 말고, 힘내고! 당분간 내가 모친 돌볼테니까, 걱정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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