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라고 걱정하는 자식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모친이 혼자서 동네를 순찰하고, 은행을 가고, 시장을 간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만 만나면 갑자기 현관 비번을 모르고, 본인의 집 비번을 버벅거리는 것이 어느 정도 쇼였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모친이 정상적으로 돌아 온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모친과 함께 영화도 보러가고, 백화점도 같이 가고, 여행도 가고, 맛집도 다니고, 한강공원에 김밥을 싸가지고 피크닉도 가고, 정말 함께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모친을 어린애처럼 감싸고 돌봐 주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한 사람도 누가 자신의 일을 다 해 주면 의존심만 키운다. 우리 모친도 우리가 밥 세끼 챙겨주고, 약 챙겨주고, 산책시켜주고, 정말 어린아이 같이 호호 불며 케어를 해 주고 있다. 그랬더니 이제 모친은 반찬도 안 하고, 밥도 안 해 먹으려 한다. 오직 우리가 와서 다 해주겠거니 하고 기다린다.
서울로 이사 온지 한 달이 되어 간다. '서울이 얼마나 낯설고, 복잡할까' 해서 몇 주는 데리고 다니며 동네 지리를 익히게 주력을 했다. 그 덕분인지 이젠 혼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집과 현관 도어락도 모두 컨트롤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친의 자전거에서 손을 떼고, 혼자 자전거를 타는 것을 지켜보는 단계이다. 그래서 모친이 먹는 약을 벽의 큰 달력에 스카치 테입으로 붙여 놓았다. 해당 날짜 밑에 약을 붙이고 옆에 '점심 후, 저녁 후'라고 써 놓았다. 매일 잘 챙겨 드셨는지 오늘이 토요일인데, 금요일까지 약을 클리어 한 것이다!
처음에는 매끼 식사를 챙겨서 같이 먹고, 약도 그 자리에서 드시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점심만 같이 먹고, 저녁에는 식사는 않고, 약만 챙기러 방문했다. 그러다가 점심은 같이 먹고, 약을 달력에 붙여 놓고, 전화를 해서 약을 드시도록 했다. 지금은 식사는 따로 하고, 전화로만 복약하도록 했다. 지금부터는 전화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모친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내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그것이 빈말인지 알았지만, 알았다고 했다.
저녁에 모친은 내게 전화를 걸어 읍소했다. 너무 무섭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오라는 것이다. 나는 저녁 약을 일단 드시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몸이 매우 안 좋아서 갈 수 없다고 했다. 사실 모친의 집 매도 및 매수, 이사, 공과금 및 세입자 정리, 모친 서울 적응시키기 등으로 몇 달간 나의 건강을 돌볼 여가가 없었다. 나도 지극히 몸이 안 좋은 상태라, 지속가능한 관계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나를 보호하기 위한 선을 그어야 했다.
동생댁에게서 연락이 왔다. 모친이 그 쪽으로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내게는 울면서 전화를 했는데, 동생댁에는 멀쩡한 목소리로 보험 얘기 등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한 번 찔러 보고 안 먹히면, 작전을 변경할 정도로 유연하니, 이제는 정말 홀로서기 단계로 들어가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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