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에 치매 증상자가 있으면 온 식구가 기존의 생활 패턴이 깨지고, 치매 증상자를 중심으로 삶이 재편성된다. 물론 치매 증상자가 없는 것이 최상이다. 그렇다고 치매 증상자가 생겼다고 해서 인생이 완전히 최악이 되거나, 불행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힘들기는 하지만 모든 일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1. 치매 증상자와의 일상생활
- 시간과 방향의 감각을 잃어버린다.
-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지 달력에 표시하고, 메모지를 붙여 놓아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 본인 집의 도어록과 공동 현관문의 버튼을 매번 가르쳐 주어도 헤맨다. 열쇠가 필요 없는데 열쇠를 어디에 둔 지 모른다고 한다.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 손으로 잡아당겨 확인했으면서도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문을 안 잠갔다고 걱정한다.
- 길을 잃을까 봐 혼자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누군가 동행해서 매일 외출을 시켜 줘야 한다.
- 본인의 부탁으로 볼일을 보러 나왔는데, 왜 나왔는지 어디를 가는지 여러 번 질문하고 잊어버린다.
실제 예를 들어 보겠다. 이사를 하게 되어 전에 살던 집의 공과금 자동이체를 해지해야 한다고 은행에 같이 갔다. 본인이 가방에서 신분증, 도장, 통장을 꺼내 제출하며 원하는 것을 부탁한다. 전자 화면에 건마다 이름과 서명을 한다. 7건의 자동이체를 모두 해지하고 은행원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나온다. 매우 흡족해하며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날씨가 좋다는 얘기며 소소한 대화를 즐겁게 하며 식당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게 묻는다. 본인이 왜 오늘 은행에 왔는지... 불과 30분 전의 사건을 완전히 잊고 있다. 그런데 매 순간마다의 대화는 멀쩡하니 옆에 있는 사람은 당황한다.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술 마시며 진지한 얘기를 하고 나서, 그다음 날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현상과 비슷하달까.
- 세탁기는 다 돌아갔는데도 빨래를 안 널고 있다가, 더러운 옷인가 하고 또 세탁기를 돌린다.
- 분명히 잠자기 전에 난방을 세팅해 줬는데 아침에 가보면 꺼져 있고 밤새 추웠다고 한다. 난방 버튼에 빨간 스티커를 붙여 놓았는데, 끄는 것은 잘하는데 켜는 것은 잘 못하는 것 같다.
- 설거지를 하며 더운물이 안 나온다고 화를 낸다. 온수를 트는 법을 알려줘도 고무장갑을 끼라고 해도 귓등으로 듣는다.
- 돈을 못 찾고는 가족을 도둑 취급한다.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아무 때나 가족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전화를 해서 돈이 없어졌다고 울며 하소연한다.
- 물건을 너무 잘 정리한다. 그런데 어디에 둔 지 모른다. 잘 보이는 곳에 두루마리 휴지를 걸어두었는데 휴지가 없다고 할 정도이다.
- 다른 사람의 말이나 질문을 잘 안 듣고, 본인이 원하는 얘기에 빠져 반복한다. 옆에서 컨트롤해줘야 대화가 진전된다.
- 외식을 했는데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 자식 집에서 잤는데 밤에 어느 집에서 잤는지 물어보면 모른다.
- 가장 무서운 것은 기억의 왜곡이다.
실제 사건의 예를 들어 보겠다. 지난달, 모친의 집 잔금을 치르기 위한 돈의 조달을 위해 우체국에 갔다. 나는 옆에서 모친의 정기예금 4,500만원을 해지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우체국 직원은 그 자리에서 3,000만원은 모친의 부동산 구입 총책을 맡은 아들에게 송금하고, 1,500만원은 본인의 국민은행 계좌로 이체하였다. 그동안의 이자 수익은 8,000원인데, 각각 수수료가 4,000원씩이라 이자 수익이 고스란히 수수료로 들어가 둘이서 허탈해하며 웃었다.
무사히 잔금을 치르고 모친은 드디어 서울의 집으로 당당히 입성하였다. 수일이 지난 후 모친이 내게 본인이 적은 어떤 기록지를 보여주었다.
우체국 정기예금 5,000만원 OOO이 해약함. 내가 우체국 정기예금 넣은 통장을 OOO이 빼서 집 사는데 보태야 한다면서 OOO이 5,600만원 해약했음. 해약한 정기예금 몽땅 OOO이 가져 갔음. 나한테 3만원 주고 갔습니다. OOO이 나한테 집값이 모자라서 현금 있으면 다 내놓으라고 해서 200만원 줬습니다. |
해지한 정기예금이 4,500만원인데 5,000만원에서 다시 5,600만원으로 바뀌어 있었고, 모친과 아들에게 나누어 입금했는데, 내가 모든 돈을 갈취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또 내가 주지도 않은 3만 원과, 내가 받지도 않은 현금 200만원은 뭐란 말인가.
중요한 것을 잊지 않으려고 메모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가상하다. 또한 기억의 파편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도 훌륭하다. 문제는 기록을 통해서 모친은 그것을 계속 읽고 또 읽으면서 기정 사실화한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가족들은 자꾸 이 말을 듣다 보면 세뇌되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생긴다는 것이다. 서로 도우며 어려움을 함께 해야 하는 마당에 가족 간의 불신과 불화를 조장한다. 또한 옆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고, 도움을 준 사람이 타깃이 되니 누가 모친을 앞장서서 돌보려고 할 것인가.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모친에게로 돌아간다.
2. 치매 증상자가 여전히 잘하고 있는 것들
모친은 희한하게도 치매 증상의 와중에도 의복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하다. 아무리 추워도 본인의 미적 관점에서 예쁘지 않으면 안 입는다. 누구니 한겨울에는 꽁꽁 싸매고 검은색 일색으로 롱 패딩을 입으며 따뜻한 게 최고라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노인네 춥다고 따뜻한브랜드 롱패딩을 사드렸는데, 딱 한 번 입어 보고는 불편하다고 안 이쁘다고 몰래 버린 눈치다. 정말 서운했다. 그냥 날 다시 주지...
그런 식으로 아무리 추워도 중성적인 느낌의 플리스 재질의 옷은 안 입는다. 속에 입으면 따뜻한 패딩 조끼도 안 입는다. 목도리도 안 한다. 외출하자고 하면 뭔가 하늘하늘하고 여성스러운 춘추용 블라우스와 얇은 춘추용 잠바를 꺼낸다. 내가 질색을 하며 따뜻한 옷으로 입으라고 성화를 부려야 마지못해 두꺼운 옷과 털 잠바로 갈아입는다.
얼마 전에 모친의 미적 집착이 있는 줄 모르고 함께 외출했다가 하도 추워하길래 모자를 씌어주며 옷을 여며주었다. 맙소사... 그 한 겨울에 속에 블라우스 한 개만 달랑 입고 있는 것이다. 부랴부랴 손수건으로 목에 스카프를 매 주었지만 결국은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예쁜 것을 선호하고, 청결하게 목욕도 잘한다. 80세가 넘었으니 안 할 법도 한 머리 염색도 때맞춰 잘하여 흰머리 한 올 없다. 불시에 집에 방문해 보아도 언제나 집은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설거지도 미루는 법이 없다.
식구들에게는 완전 깡패, 무법자, 막가파, 징징이, 가스라이터인데 밖에서는 어찌나 애교가 넘치는지 모른다. 이야기를 할 때 울고 웃고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모친을 보고 누군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감이라고 했다. 여전히 감정이 풍부하다. 긴 겨울을 이기고 올라오는 작은 새순을 보고 감동하며 한참 동안 들여다 보고 찬탄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이 소녀와 같이 어여쁘다.
나는 외출을 할 때는 보온병, 종이컵, 믹스커피 등을 준비해 간다. 내 백팩은 아기 엄마나 갖고 다닐 법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위에 열거한 것 외에도 간식, 생수, 우산, 두루마리 휴지, 여분의 마스크, 모친의 약, 내 책 등으로 가방이 항상 묵직하다. 한강공원, 연남 파크, 체육공원 등을 산책한 후에 벤치에 앉아 보온병을 꺼내면 모친은 벌써부터 좋아라 한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3부 넣어 잘 저어 준다. 그다음 6.5부 정도로 물을 채워 다시 저어 준다. 모친은 이상하게도 내가 타 준 커피가 맛있다고 한다. 아무리 아껴 먹어도 금방 바닥이 난다고 안타까워한다.
비빔국수, 비냉, 비빔밥, 낙지볶음 등을 좋아하며, 어제는 중국인이 직접 하는 식당에 가서 간짜장과 마파두부밥을 먹었는데 맛있다고 클리어를 했다. 그렇게 미각이 살아 있고, 여전히 식욕이 좋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 귀찮아서 밖에 안 나가려고 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고 눈을 맞추면 백 프로 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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